정부에서 활동하던 유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유민에게 정부로 복귀하여 더 중요한 일을 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유민은 그런 아쉬움을 뒤로 하고 중앙매스컴을 택해 새 출발을 시작했다.
종합매스컴의 큰 방향을 정하고 이것의 구체화, 실현을 위한 적임자를 찾고 있던 호암 이병철 회장이 유민을 발탁했고, 유민은 정부에서 보여 주었던 능력 못지 않은 중요한 족적을 언론계에 남겼다.
1)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기업형 경영을 선언한 중앙일보는 경영태도 뿐 아니라 그 내용 역시 파격적인 것이었다.
생활에 필요한 신문, 쉬운 신문, 고객만족의 극대화를 목표로 제시한 유민은 정보가 풍부하고 교육적이며 재미있는 신문을 만듦으로써 1966년 중앙일보 창간 한 해만에 판매부수 1위의 신화를 달성했고, 매년 30% 이상의 고속성장을 거듭, 1978년 발행부수 100만부를 돌파하는 등 언론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을 세웠다.
방송에서도 참신성과 적극성을 제작과 편성의 기본지침으로 설정한 유민은 일선에서 직접 제작과 편성을 진두지휘함으로써 라디오는 물론 TBC(동양방송)방송도 후발주자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다른 방송국들을 멀찌감치 따돌리며 시청률을 높여 나감으로써 그의 탁월한 능력을 바탕으로 풍성한 결실들을 거둬들였다.
유민은 기업적 경영과 함께 매스컴 경영의 또 다른 기둥으로 도의문화의 진작을 강조했다.
도의의 실종에서 오는 우리 사회의 위기를 타개하는데 매스컴이 커다란 책임을 갖고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유민은 종합매스컴센터에서 한 걸음 나아가 정보산업의 전당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이미 세계화된 시야를 보여 줬을 뿐 아니라 정보화사회를 예견하고 그 준비를 서둘렀다.
유민은 중앙일보 창간 10주년이 되던 1975년에 매스컴의 보다 먼 미래를 이렇게 내다보았다.
"전자·컴퓨터 등 새로운 과학은 매스컴에도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50년 후 또 어떤 새로운 미디어가 생겨나고 우리의 일상생활이 어떻게 변할지는 예상하기 어렵다.·······거대한 변화가 온다는 것,·······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
유민은 50년 후까지 중앙매스컴을 내다보는 설계도를 펴나간 혜안이 있었다.
그리고 유민이 매스컴에 남긴 진정한 가치는 더 높은 이상이다. 공동선(共同善)의 추구, 희망의 회복, 미래를 위한 도전이었다.
정치의 혼미, 경제의 빈곤, 국민의 실의, 사회의 불안이 겹겹으로 쌓인 암담한 현실을 뛰어넘는 희망·번영·품격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2) 국제인과의 폭넓은 교분

유민이 한국언론에 기여한 일 중의 하나는 언론의 국제교류를 넓힌 것이었다.
유민이 언론계에 있는 동안 1972년 벨기에 총회에서부터 1985년 동경(東京)총회까지 빠지지 않고 참석한 회의가 FIEJ(국제신문발행인협회)총회였다.
유민은 세계언론과 언론인들이 한국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알고 이해를 넓혀가도록 힘썼다.
특히 1980년 5월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총회에서 아시아 지역 대표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FIEJ 본부이사로 선임되는 등 FIEJ 업무전반에 관해 기획·감독하며 총회의 의제결정 및 예산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는 역할을 했다.
유민은 세계 언론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매스컴의 오늘과 미래에 관해 의견을 나누곤 했다.
유럽이나 미국의 언론지도자들은 유민을 통해 동양의 사상과 철학·역사에 관한 것들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