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산업 발전에 혼신의 힘 다해

- 해무청장 시절(1955년 10월~ 1958년 2월)

1955년 10월 제2대 해무청장으로 취임한 유민은 모든 일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지방 해무청을 세우는 것을 비롯,
해태와 굴, 통조림사업 지원, 그리고 원양어업을 최우선 사업으로 설정하면서 작은 어촌의 선착장 축조와 복구,
항만, 특히 부산·군산·인천항의 항만복구 계획도 세워
실천하는 등 수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2) 장관재임 시 가장 많은 일을 했던 시기

- 법무부 장관 시절(1958년 2월~1960년 3월)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 것은 1958년 2월 20일이었다. 그 때 나이는 불혹이 갓 넘은 41세였다. 건국 후 국무위원으로서는 최연소였다.
그 때 집권당 자유당이나 대통령 비서실과는 평소 접촉이 없었다. 야당인 민주당과는 더더욱 멀었다. 그러나 여야 모두 유민의 능력과 성실성을 잘 알고 있었다. 경무대와 여당은 물론 야당으로부터도 환영과 축하를 받는 국무위원이었다.
유민이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할 때가 내각에 있던 기간 중 가장 많은 일을 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행정과 사법 분리의 고수, 대공(對共)사찰의 강화, 경제사범 단속, 공무원 부정 단속 강화, 폭력배 단속 등에 관한 시책을 성실히 수행, 새로운 국가 기강과 법질서를 만들어 갔다.



3) 헝클어진 사단(事端)들을 수습하고

- 내무부 장관 시절(1960년 3월~4월)


이승만 대통령이 집무실로 유민을 부른 것은 3·15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마산사태'가 일어난지 며칠 안된 1960년 3월 22일 오후 늦게였다.
"아무래도 자네가 내무를 맡아야겠네. 발령받는 대로 마산에 직접 내려가 사건 처리를 하게" 대통령의 분부였다.
그 다음날 23일 내무부 장관 발령을 받았다. 법무부 장관은 공석으로 둔 채 최인규 내무의 사표를 수리한 내무경질이었다.
결국 유민은 최내무가 저지르고 헝클어 놓은 사단(事端)들을 수습하고 정리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유민은 1960년 3월 24일 '마산사태'의 진상을 밝히고 대책을 마련하는 등 민첩하게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노력했다.
또한 대통령에게 "부통령 선거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고, 사태수습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시국수습 방안의 하나로 이기붕 의장을 직접 만나 부통령 당선 사퇴의 결단을 촉구했다.
이러한 그의 모든 일들은 '안정의 회복'으로 귀결된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