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을 회상하며* 가나다 순으로 구성
- 계창업前 변호사
- 고일환前 동양방송 심의실장
- 김영희중앙일보 대기자
- 김일환前 내무부 장관
- 김정렬前 국방부 장관
- 노계원前 동양방송 외신부장
- 문홍주前 문교부장관
- 민복기前 대법원장
- 방우영조선일보 회장
- 서정각前 변호사
- 성병욱前 중앙일보 편집국장
- 송인상前 부흥부 장관
- 신두영前 국무원 사무국장
- 신훈철前 삼성코닝 사장
- 신현확前 국무총리
- 이병철前 삼성그룹회장
- 이영섭前 대법원장
- 이종기前 중앙일보사 사장
- 이태영前 변호사
- 황산덕前 문교부 장관
계창업桂昌業
前 변호사
"유민도 나도 영화를 좋아해 새 영화가 들어오면 놓치지 않고 관람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쯤은 갔으니까·····여행도 빼놓을 수 없는 대학생활의 일부였다. 친구들 중 한 사람의 시골집 방문이 여행의 시작이었다. 시골집 사랑방을 공부방으로 정해 몇 친구들이 생활을 함께 했다. 그러다가 며칠은 가까운 산·바다·온천장 혹은 사찰 등 명소를 찾았다. 유서 깊은 서원을 찾아가 선비들과 담론하는 일도 여행의 보람이었다."
고일환高日煥
前 동양방송 심의실장
"유민은 77년 제작 간부를 불러 '실수의 스타일북'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 생방송에서의 아나운서 또는 PD의 실수로 인한 방송사고, 제작 과정에서의 실수, 잘못된 기계조작에 의한 기술 사고, 심지어는 숙직 근무자의 철야도 중 빚어지는 실수·사고 등을 다시 반복해서 발생시키지 않으려면 그런 실수나 사고의 경험을 '스타일북'을 만들어 기록하여 모두 숙지하고 사전에 조심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다."
김영희金永熙
前 중앙일보 대기자
"유민은 기본적으로 독서는 필수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책 속에는 인간의 도전의 경험이 담겨 있고 인류가 도전하려는 미래도 있다. 책을 읽지 않고서는 오늘을 이해할 수 없고 내일을 내다보는 눈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유민의 기준에서 보면 매스컴 종사자에게 독서는 필수 이상이었다. 매스컴에서 일을 오래 계속하고 더 중요한 역할을 맡기로 바란다면 독서량을 훨씬 늘려 잡아야 한다고 했다."
김일환金一煥
前 내무부 장관
"홍진기 법무부 장관은 한·일회담을 준비하게 했고, 대일 교섭을 능란하게 해내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신임을 쌓았다. 한·일회담 때도 대통령은 홍대표에게 특별한 격려를 했었다. 아마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 직후였던 듯한데, 홍법무는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경무대 집무실에 갔다. 이때 대통령은 홍법무에게 앞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다. 그러더니 대통령은 갑자기 홍법무의 두 손을 잡고 'You have to remain as honest as you are.'라고 말하고 두 손에 입을 맞추었다. '자네는 한결같이 정직해야 하네'라는 뜻이지만 그보다는 신뢰의 표시고 확인의 뜻이 담겨 있었다. 대통령의 이 뜻밖의 행동에 홍법무는 몹시 당황했지만 대통령의 말씀이나 동작에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김정렬金貞烈
前 국방부 장관
"3.15대통령선거 때 부정선거로 말미암아 비상사태가 일어나고 있을 때도 홍내무와 나는 이기붕 의장에게 갔었죠. 그때 홍내무는 이의장에게 강경 진압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고 설명하면서 '지금 마산이 쑥대밭이 된다 해도 오히려 여기서 민중의 울분을 풀도록 해주어야지, 이 일이 다른 곳에까지 파급되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진주와 부산에서도 데모의 기운이 일고 있는 이때 어떻게 강력 수단을 쓸 수 있겠느냐'라고 이의장의 강경 진압 의견에 대해 강력히 설득을 했죠."
노계원盧癸源
前 동양방송 외신부장
"유민은 취재 계획의 검토 단계에서부터 직접 참여했다. 79년 적도 아프리카 7개국 횡단 취재 계획을 세울 때 일이다. 취재 테마가 적절한지 책임자를 불러 자세히 묻고 충고도 했다. 그리고 기획 방향과 내용에 맞는 원고를 완성할 정도로 완벽한 사전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런 어느 날 세부 주제와 취재 방향 등을 세밀히 물은 뒤에 출장 결재서류에 서명하곤 했다."
문홍주文鴻柱
前 문교부장관
"유민과 나는 무엇이든 일본인에게는 지기 싫었다. 특히 우리 둘은 강의시간 외에는 거의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도서관의 우리 자리가 고정되어 버렸다. 우리가 늦게 들어오는 때에도 우리 둘의 자리는 비워두어 도서관의 두 자리는 어느새 유민과 나의 지정석이 되었다."
민복기閔復基
前 대법원장
"유민은 문과 쪽 한 명으로 선택되어 경성제대 최초의 한국인 조수가 되었다. 사법연구실의 책임자이자 일본 상법 학계의 권위였던 니시하라(西原) 교수가 지도 교수였다. 당시 니시하라 교수는 월 1회 독일법 강독회를 열었다. 그때 나는 경성 지법 판사로 있을 때이지만, 그 교수의 강독회에는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경성제대의 일본학자와 현직 법관 등 30여 명이 강독회에 참가했는데, 유민은 이 강독 회의 진행을 맡고 있었다. 강독 회의 주제와 토론의 내용은 요약정리되어 학내 잡지에 실리곤 했는데, 독일어가 뛰어난 유민이 이 일을 주관해 잘 처리했다"
방우영方又榮
前 조선일보 회장
"유민의 첫인상은 위엄과 격식을 중시하는 선민성(選民性)으로 비췄다. 겉보기엔 엘리트 의식이 강하고 고고한 인상으로 비추고 있으나, 깊게 사귀어 보면 냉철한 외모와는 달리 다정다감했고 소박한 내면을 지니고 있던 인물이다. 신문사 사장을 하려면 기자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도 가 봐야 한다는 권유를 쫓아 다동의 낙지집과 포장마차에 다니기도 했다"
서정각徐廷覺
前 변호사
"홍선생님과 우리 집안은 세교(世交)가 있었다. 나 역시 경기고 출신으로 후배이기도 하여 홍선생님이 큰형님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던 차에 상법 강의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강신청을 했는데, 그 첫 시간에 리포트가 부과됐다. 내 딴으로는 꽤 열심히 써내면서 A 학점을 자신했는데 결과는 C였다. C를 받고서야 그때의 우리 학교를 돌아보고 내 스스로 돌아보면서 학문에 대한 결의를 다졌던 기억이 새롭다."
성병욱成炳旭
前 중앙일보 편집국장
"언론통폐합 조치가 있은 지 1개월쯤 지난 어느 날 유민은 편집국에 배속된 기자 몇 명을 회장실로 불러 소파에 마주 앉혔다. 이들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인자한 미소를 띠며 '고맙네. 자네들 같은 실력이라면 신문이라고 못할 일이 없을 걸세. 하루속히 충격을 잊고 일에 적응해 주길 바라네, 시간이 지나다 보면 방송을 할 날이 있을지 누가 알겠나. 열심히들 일하게'라고 위로의 말씀과 함께 자신감을 가져 줄 것을 당부했다."
송인상宋仁相
前 부흥부 장관
"1961년 유민과 나는 수형생활이 시작되었다. 기결 수감에선 여럿이 함께 기거하고 운동 때는 다른 방의 동료들도 마주칠 때가 많았다. 그런데 교도소 생활에선 서로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는 아호를 쓰기로 해서 나는 회남(淮南)이라 지었다. 홍진기 형의 아호는 우리의 선배인 이중재(李重宰) 전경 성전기 사장이 지어주셨다. 그분도 자유당 기획 위원 탓에 함께 수형생활을 했는데, 홍형에게 '유방(維邦)'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셨다. 뜻은 유민의 인품과 의지에 아주 잘 어울리는 아호로 생각되었는데 내가 우스갯소리로 '그걸 읽으면 다른 것을 연상하게 되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홍형이 이중재 씨에게 '저는 늘 백성을 생각하며 살아가겠다는 마음이니 선배님께서 지어주신 유자(維字)를 빌어 유민(維民)이라고 하고 싶다'라고 해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
"그는 확실히 다방면에 천부적인 소양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EC 대사로 있을 때였다. 유민이 파리에 와서 우리는 같이 숙식을 했다. 그는 파리의 건축양식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특히 발코니의 양식이나 디자인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지적했다. 나는 유민보다도 파리에 더 자주 가고 더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유민이 지적한 것과 같은 차이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신두영申斗泳
前 국무원 사무국장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이 관계장관의 설명에 부족함을 느끼거나 대통령이 잘못 알고 책(責) 하는 일이 있을 때면 홍법무감 대신 설명하는 등 대통령의 오해를 자연스럽게 해소하곤 해 자연히 국무회의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59년 조정환 외무장관이 해임되고 후임 장관을 임명하지 않은 채 최규하 차관이 장관직을 대행하게 되면서 중앙청 국무회의는 홍법무감 주재하게 되었다."
신훈철申勳撤
前 삼성코닝 사장
"홍 회장이 80년대 기업 경영에서 강조한 것은 장기적인 기업이익을 중요시하라는 것이었다. '품질 제일주의 그리고 세계시장의 점유율 확대를 중요시하는 일본 경영의 장점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세계시장에 진출하려면 일본을 따라잡고 이겨야 한다'라고 했다. 그렇지만 만약 홍 회장이 살아 계셔서 앞으로의 경영에 대해 말한다면 세계적인 기업이 되려면 인류의 공존 공영과 기업의 사회 공헌에 관심을 갖고 환경문제, 노사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하라고 말씀하실 것 같다."
신현확申鉉碻
前 국무총리
"내가 상공부 국장이던 때 유민과 점심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날 유민은 사람이 일을 하는데 잘하면 더욱 좋겠지만 자기 능력의 7~8할쯤 발휘하는 것이 가장 잘하는 것이라 했다. 유민은 나에게 '의욕이 앞서 보이는데 너무 욕심부리지 말라'라고 충고하곤 했다. 나의 합리주의는 유민에 미치지 못했다. 유민은 정이 깊었다. 정이 깊은 사람은 한번 사귀면 오래간다. 내가 80년대 정부에서 나와 쉬고 있을 때도 자주 전화해서 신간 서적을 추천해 주기도 하고 보내 주기도 했다. 유민은 한 번 사귄 친구는 평생을 사귀었다"
이병철李秉喆
前 삼성그룹회장
"61년 서울에서 홍법 무장관에게 내가 차관을 얻지 못하면 대한민국에서 다른 어느 누구도 이만한 규모의 차관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얘기했더니 홍법 무도 선진국들이 후진국에 대한 개발차관을 시작했다는 얘기를 하면서 '잘 될 것으로 믿습니다. 정부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도록 힘써 보겠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이 일로 정부의 여러 관계자들과 만났는데 홍법 무장관은 국가경영이나 국가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뛰어난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이영섭李英燮
前 대법원장
"유민이 일러주어서 경성대학 법학과에서 상법 제2부(회사법) 시험에 우수한 성적을 받은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 회사법의 교수는 니시하라 간이치(西原寬一) 교수였는데, 시험에는 꼭 판례 비평이 출제된다면서 그 대비책으로 그 교수가 『민상법』잡지에 집필한 것을 읽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유민이 일러주는 대로 공부했더니, 출제는 과연 판례 비평이 났다. 유민의 지도에 감읍할 따름이었다"
이종기李鍾基
前 중앙일보사 사장
"80년 언론통폐합 때의 일이다. TBC가 없어지게 된 이후 유민은 단 한 번도 통분이나 허탈감을 말하지 않았다. 참담한 심정을 내면 깊숙한 곳에 삭이면서 오히려 사원들의 낙심과 좌절을 걱정하고, 진정시키는 일에 노심초사했다. '동양방송을 잃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슬픈 일은 훌륭한 인재들을 잃는 일이다.'라고 간부 회의에서 말한 것이 유민이 겉에 나타낸 아쉬움의 단 한마디였다."
이태영李兌榮
前 변호사
"홍진기 선생님은 내가 서울대학교 법과 학생일 때 강사로 나오시어 상법, 특히 주식회사법을 가르쳐 주셨던 분이다. 당시 그분은 법무부 차관이었는데, 미남에 용모가 단정하시고 강렬한 눈빛을 가져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조용하고 야무진 그의 강의는 나와 같은 노 학도의 귀에도 쏙쏙 들어와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강사였다. 이때로부터 홍선생님에게서 받은 세 번의 따뜻한 격려와 한 번의 따끔한 충고를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평생 잊지 않고 있다. 상법 수강생 시절, 홍선생님은 강의를 다 마치고 나가시면서 '여러분, 이 리포트는 이태영 씨와 아무개의 것인데 모범답안이라고 생각해서 여기 창가에 놓고 가니 여러 학생들이 다 읽어보기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홍선생님은 뒤늦게 법학 공부에 뛰어든 한 여학생을 이런 식으로 격려해 주려는 뜻이겠지만, 내겐 대단한 자신감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황산덕黃山德
前 문교부 장관
"특히 유민의 화술은 뛰어나 그로부터 법학 공부의 요령이라든지, 교수들의 평가 내지는 독서방법 같은 것을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학부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나는 법학 공부에 관한 많은 예비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관계로 나는 2년 동안에 학점을 모두 딸 수 있었고, 나머지 1년은 동경에 가서 공부할 수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그렇게 학점을 빨리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유민으로부터 들은 예비지식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역시 그는 나의 선배였다."